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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과장 인사말
지금 우리는 역사적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난 냉전체제 하에서 동서간의 대립과 반목은 역설적으로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에서 동서간의 세력균형에 의한 안정성을 유지시켜 온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급속한 경제발전과 함께 나타나는 군사력의 강화, 사회주의적 이념이 사라진 곳에 새롭게 자리잡고 있는 중화민족주의, 북한의 벼랑끝 전술로 인한 핵, 중장거리 미사일 개발 등은 일본의 재군비를 촉진시키고 있으며, 이것을 용인함으로서 중국과 북한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입장은 우리들의 대외 군사안보 외교에 있어서 새로운 과제를 던져 주고 있습니다.

기존의 한미일 공조를 계속 유지해야 할 것인지. 그 속에서 일본의 재군비화를 어떻게 견제해야 하는지. 중국 또는 러시아와의 군사 안보적 관계설정은 어떠한 형태가 바람직한지 등 군사적 위험요인이 가장 높은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전쟁의 위험을 없애며 평화적 번영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심각한 이론적 실천적 사고 과정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한편 새로운 경제적 지역주의의 대두와 중국의 경제발전, 일본의 경제적 침체라는 변수는 기존의 한일간의 경제협력을 새로운 단계로 발전시켜 갈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경제적 지역주의에 대응하기 위해 지금 논의되고 있는 것과 같은 한일간의 경제협력체의 형성 필요성은 단순한 양국의 성장잠재력과 경제활성화의 제고에 필수적이라는 것만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한중일 또한 한중일+아세안 경제공동체 형성의 초석으로서 자리 매김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한일간의 자유무역협정 체결, 통화협력, 아시아개발은행과 같은 개발원조체제의 정비 등과 같은 과제는 이미 한일간의 이국간 관계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국제경제체제의 발전방향까지 고려해 나가며 추진해야 할 단계에 와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변화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한일간의 정치군사안보 및 경제적 협력관계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은 과거 역사적 경위에 의한 상호불신이 강한 양국 내에서 격렬한 국내의 저항에 직면하게 할 가능성이 크다는데 있습니다. 이러한 국내조정비용을 줄여나가기 위해서는 각국간의 심리적 거리감을 줄이는 것이 필요하며 이 때문에 양국의 문화 및 가치관의 공유가 요구됩니다.

이상과 같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첫째 우리가 나가야 할 이념(vision)을 분명히 설정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평화, 인권, 자존, 공동체적 협력 등과 같은 용어들은 그것들이 너무 빈번히 사용되는 것에 의해 개념이 가지고 있는 신선함과 깊은 함의가 상투화되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사회를 앞으로 만들어 가려고 하는가. 그리고 그 속에서 국제적 협력은 어떠한 형태를 띠어야만 하는가. 공동의 이상과 목표를 동북아의 국제질서, 나아가서는 세계적인 국제기준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국가적 장래에 대한 깊은 사상적 苦鬪인 것입니다. 사상적 기초가 없는 과학적 분석은 상황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또한 과학적 기초가 없는 사상은 현실적응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더구나 이러한 비젼의 제시가 없는 정책학적 분석과 개혁과제의 도출은 결국 정책 실시과정에서의 이익집단의 반발에 부딪혀 개혁의 실종으로 귀결되어 버리기 마련입니다. 상황의 변화에 따라 유연하게 전술적 대응을 해 나가는 것도 중요하나 전략적 목표치에 대한 심각한 지적 고민이 없이는 전술의 유용성도 사라지는 것이 바로 우리가 지난 과거의 지적 역사에서 배워야 하는 교훈입니다.

둘째, 우리 사회의 지향점에 대한 도출은 면밀한 과학적 분석 위에서 처음으로 정책적 유용성을 가진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탈 민족주의, 탈 국가주의, 시장중심주의와 상생의 원칙 등 이 사회가 지향해 나가야 할 덕목 중에는 그 덕목을 실현하기 위한 상당 정도의 치밀한 전술적 사고가 요구되는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념이 현실적응력을 잃어버렸을 때 발생되는 교조주의적 편향은 결국 인간사고의 자주성, 창조성을 억압시켜 왔던 것을 우리는 역사적 경험 속에서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관용'의 덕목에 입각하여 사상적 입장이 서로 다른 사람간의 지적 논의공동체가 필요하며, 그것을 현실적 정책적 필요에 따라 명확히 사고해 나가는 자세가 시급히 요청되는 것입니다.

서른 다섯의 나이 일본학과 개설과 함께 시작했던 저의 대학 교수생활도 이제는 어느덧 마흔이 훌쩍 넘어버렸습니다. 흔히들 마흔을 불혹이라고 합니다만 만약 그 말이 기존의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가치관, 고정관념에 대해 의심이 없다라는 말로 해석된다면 저는 불혹임을 거부할 것입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뜻을 세워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에서의 불혹이라면 저는 불혹이고자 합니다. 저희들 홈페이지가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뜻을 바르게 세워 나가는데 자그마한 힘이라도 보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 일본학과장 김종걸